
지금으로부터 130여년 전인 1890년 들어 전라도에서 수탈이 극심해지자 1893년 11월 들어 전라도의 고부와 익산,
전주 등지에서 백성들이 봉기를 일으키게 되는데 이는 추수 이후 탐관오리들의 극심한 수탈에 대한 저항이었다.
탐관오리의 횡포는 매관매직의 성행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어찌나 심했던지 당시 일본에서 발행하는 신문에는
조선 관직의 매매 가격이 실릴 정도였다.
동학혁명의 시작이었던 1894년 1월 고부에서의 기포(起包: 동학 농민 운동 때 농민 등이 동학의 조직인 포를 중심으로 봉기한 사건)는
당시 최악의 탐관오리였던 고부군수 조병갑의 농민 수탈이 극에 달하면서 일어났다.
이에 11월 15일 전봉준을 포함한 고부의 동학도들은 고부군수를 몰아내기 위해 송두호의 집에서
기포를 모의하고 결의를 다지기 위해 ‘사발통문’을 만들었다.
사발통문은 사발을 엎어 그린 원 주위에 참가자의 이름을 빙 둘러 적어, 누가 주동자인지 알 수 없게 만든 것으로
조선 말기 민중 저항이나 동학 농민 운동 등에서 널리 사용된 문서다.
동학 농민군의 봉기는 1894년 2월 15일에 시작되었다.
이날 새벽 1천여 명의 농민군은 이마에 흰 띠를 두르고 죽창과 농기구를 무기로 삼아 말목장터에 집결하였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20명의 지도부는 동학교도들에게 사발통문을 돌렸는데
그 내용은 고부군수 조병갑을 처단하는 것은 물론이고 전주영까지 함락시키는 것이었다.
이는 바로 농민과 관의 대대적인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조선 말기 민란이 곳곳에서 일어났지만 대개는 조정에서 안핵사(특사)를 보내 해결하는 것이 상례였는데
이때도 안핵사가 내려와 동학 농민군 대표들과 면담 후, 그들의 요구사항을 들어 주기로 한다.
바로 농민 자치와 직접 민주주의의 상징적 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하는 것인데 집강소의 설치 과정에서 양반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쳤다.
행동 강령 속에 '빈부의 차이를 없애고 상전과 노비의 구별을 없앤다.', '또한 양반과 유림의 방자함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양반들은 이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듯 동학 농민군 세력이 강성해지자 경계심을 느낀 왕비 민씨는 청에 도움을 요청, 청군을 이용해서
이들을 진압하려 하지만 텐진조약에 따라 일본 역시 군대를 조선에 파견 시킨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 조정을 장악하게 된다.
보국안민과 외세 배격을 기치로 내걸었던 동학은 일본의 국권 침탈 행위에 분개하며 다시 한 번 봉기했다.
1894년 9월 전봉준, 김개남 등은 다시 사발통문을 띄워 궐기를 호소하였다.
이때 봉기에 동원된 농민군은 남접 10만과 북접 10만을 합해 약 20만 병력이었다.
하지만 최신 무기를 소지한 정예부대에 동학농민군은 폐배하고 만다.
동학농민운동은 수운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농민 중심의 민중항쟁이라고 할 수 있다.
동학은 신분제의 타파를 외치고 있었기 때문에 혼란한 조선말 상황에서 가난한 농민들이 의지할 수 있는 종교였기 때문이다.
동학농민운동의 핵심성격은 “반봉건적, 반외세적 농민항쟁”이다. 농민이 주축이 되는 운동으로
지배계층에 대한 조선 시대의 최대의 민중 항쟁이었다.
일본의 침략 야욕과, 부패·무능한 조선왕조 봉건 지배층의 외세 의존 및 보수 유생의 체제 수호의 벽에 좌절하였으나,
1894년 이후 전개된 의병항쟁, 3·1독립운동과 항일 무장 투쟁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회개혁 운동과
자주적 국권 수호운동으로서 한국의 근대화와 민족민중운동의 근간이 되었다.
미완의 혁명으로 끝났으나, 19세기 후반 우리나라와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를 변화시키고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을미의병 활동, 3·1운동, 4·19혁명, 5·18광주민주화운동의 모태로서
오늘날 평등사상과 자유민주화의 지평을 연 근대 민족사의 대사건이었다.
2017년 12월 19일,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제2조)이 제정되었다.
이 법은 봉건제도를 개혁하고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고 계승·발전시켜 민족정기를 북돋우려는 목적을 담고 있다.
또한 동학농민운동 참여자와 그 유족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여전히 아쉬운 점이 남아 있다.
바로 3.1운동 당시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의 민족 대표자를 포함해 많은 분들이 사전 준비를 했기에 가능했듯,
동학농민운동도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라 많은 분들이 모여 사발통문을 작성하며 철저히 준비했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잊지 말자.
장석주 시인의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가 들어서서 붉게 익히는 것일 게다” 시처럼
목숨을 걸고 나라를 위해 1년 전부터 사발통문에 서명을 하는 등 혁명의 성공을 위해 애써 주셨던 분들의 명예도 함께 회복되기를 기대해본다.

황규만
한국컨택센터산업협회 부회장
(사)한국액티브시니어협회 회장
출처: 아웃소싱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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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130여년 전인 1890년 들어 전라도에서 수탈이 극심해지자 1893년 11월 들어 전라도의 고부와 익산,
전주 등지에서 백성들이 봉기를 일으키게 되는데 이는 추수 이후 탐관오리들의 극심한 수탈에 대한 저항이었다.
탐관오리의 횡포는 매관매직의 성행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어찌나 심했던지 당시 일본에서 발행하는 신문에는
조선 관직의 매매 가격이 실릴 정도였다.
동학혁명의 시작이었던 1894년 1월 고부에서의 기포(起包: 동학 농민 운동 때 농민 등이 동학의 조직인 포를 중심으로 봉기한 사건)는
당시 최악의 탐관오리였던 고부군수 조병갑의 농민 수탈이 극에 달하면서 일어났다.
이에 11월 15일 전봉준을 포함한 고부의 동학도들은 고부군수를 몰아내기 위해 송두호의 집에서
기포를 모의하고 결의를 다지기 위해 ‘사발통문’을 만들었다.
사발통문은 사발을 엎어 그린 원 주위에 참가자의 이름을 빙 둘러 적어, 누가 주동자인지 알 수 없게 만든 것으로
조선 말기 민중 저항이나 동학 농민 운동 등에서 널리 사용된 문서다.
동학 농민군의 봉기는 1894년 2월 15일에 시작되었다.
이날 새벽 1천여 명의 농민군은 이마에 흰 띠를 두르고 죽창과 농기구를 무기로 삼아 말목장터에 집결하였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20명의 지도부는 동학교도들에게 사발통문을 돌렸는데
그 내용은 고부군수 조병갑을 처단하는 것은 물론이고 전주영까지 함락시키는 것이었다.
이는 바로 농민과 관의 대대적인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조선 말기 민란이 곳곳에서 일어났지만 대개는 조정에서 안핵사(특사)를 보내 해결하는 것이 상례였는데
이때도 안핵사가 내려와 동학 농민군 대표들과 면담 후, 그들의 요구사항을 들어 주기로 한다.
바로 농민 자치와 직접 민주주의의 상징적 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하는 것인데 집강소의 설치 과정에서 양반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쳤다.
행동 강령 속에 '빈부의 차이를 없애고 상전과 노비의 구별을 없앤다.', '또한 양반과 유림의 방자함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양반들은 이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듯 동학 농민군 세력이 강성해지자 경계심을 느낀 왕비 민씨는 청에 도움을 요청, 청군을 이용해서
이들을 진압하려 하지만 텐진조약에 따라 일본 역시 군대를 조선에 파견 시킨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 조정을 장악하게 된다.
보국안민과 외세 배격을 기치로 내걸었던 동학은 일본의 국권 침탈 행위에 분개하며 다시 한 번 봉기했다.
1894년 9월 전봉준, 김개남 등은 다시 사발통문을 띄워 궐기를 호소하였다.
이때 봉기에 동원된 농민군은 남접 10만과 북접 10만을 합해 약 20만 병력이었다.
하지만 최신 무기를 소지한 정예부대에 동학농민군은 폐배하고 만다.
동학농민운동은 수운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농민 중심의 민중항쟁이라고 할 수 있다.
동학은 신분제의 타파를 외치고 있었기 때문에 혼란한 조선말 상황에서 가난한 농민들이 의지할 수 있는 종교였기 때문이다.
동학농민운동의 핵심성격은 “반봉건적, 반외세적 농민항쟁”이다. 농민이 주축이 되는 운동으로
지배계층에 대한 조선 시대의 최대의 민중 항쟁이었다.
일본의 침략 야욕과, 부패·무능한 조선왕조 봉건 지배층의 외세 의존 및 보수 유생의 체제 수호의 벽에 좌절하였으나,
1894년 이후 전개된 의병항쟁, 3·1독립운동과 항일 무장 투쟁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회개혁 운동과
자주적 국권 수호운동으로서 한국의 근대화와 민족민중운동의 근간이 되었다.
미완의 혁명으로 끝났으나, 19세기 후반 우리나라와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를 변화시키고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을미의병 활동, 3·1운동, 4·19혁명, 5·18광주민주화운동의 모태로서
오늘날 평등사상과 자유민주화의 지평을 연 근대 민족사의 대사건이었다.
2017년 12월 19일,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제2조)이 제정되었다.
이 법은 봉건제도를 개혁하고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고 계승·발전시켜 민족정기를 북돋우려는 목적을 담고 있다.
또한 동학농민운동 참여자와 그 유족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여전히 아쉬운 점이 남아 있다.
바로 3.1운동 당시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의 민족 대표자를 포함해 많은 분들이 사전 준비를 했기에 가능했듯,
동학농민운동도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라 많은 분들이 모여 사발통문을 작성하며 철저히 준비했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잊지 말자.
장석주 시인의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가 들어서서 붉게 익히는 것일 게다” 시처럼
목숨을 걸고 나라를 위해 1년 전부터 사발통문에 서명을 하는 등 혁명의 성공을 위해 애써 주셨던 분들의 명예도 함께 회복되기를 기대해본다.
황규만
한국컨택센터산업협회 부회장
(사)한국액티브시니어협회 회장
출처: 아웃소싱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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